지난 5월 11일 오전 7시 30분에 집사람이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후의 상세 조직검사결과 1기 판정을 받았고 다른 장기와 림프절로의 전이도 발견되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앞으로 4번(12주)의 항암치료, 6주의 방사선치료만 잘 견디면 될 것 같습니다.
4월 19일 울먹이며 진단결과를 전화로 알려오는 와이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처음에는 약간 멍했습니다. 암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요. 그저 나이들면 걸리는 병, TV 드라마에서의 말기 암환자들 모습 등이 제가 가지는 구체적인 암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날 점심 때 서현동의 마더스 의원에 집사람이랑 같이 들러서 의사의 무표정한 진단결과를 통보받을 때도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잘라내면 잘 되겠지 정도였죠.돌이켜 보니 저보다 의학적 지식이 훨씬 많았던 (양호교사입니다.) 집사람의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었을 거 같아서 좀 더 위로해 주지 못한 점이 아쉬운 것 같아요.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삼성의료원의 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유방암 명의로 소문이 나신 양정현 교수님의 수술을 예약할 수 있었고 2주후에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외래를 본 후에 지하 1층의 암교육센터에 들렀는데 거기 직원이 저한테 책을 권하더군요.
"내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다.(Breast Cancer Husband)" 책 볼 공간도 있고 해서 집사람이랑 같이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방암에 걸린 아내를 둔 남편의 시각으로 기술된 책인데 정말 많이 저를 깨우쳐 주더군요.
우선 남편이 할 일이 많다는 점입니다. 옆에서 걱정만 해서는 안되고 치료에도 동행해 주고 따뜻한 말한마디도 건네주고 얘기도 많이 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약간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치료 과정도 고통스럽다는 점도 있더군요. 수술 자체 뿐만 아니라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 재발과의 싸움 등이 참 많은 사례를 들어서 현실감있게 묘사되더군요. 제일 맘에 와 닿았던 부분은 "여성이 무너지는 것은 항암치료로 머리가 뭉텅이로 빠질 때이다."였습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여자 외모에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머리가 빠져서 대머리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외래 후에 5월 11일까지 2주간은 집안 일 정리 기간으로 보냈습니다. 집사람이 휴직 처리도 해야 했고 수술 후를 대비해 여러가지 물품도 많이 구입했고 저도 최대한 같이 있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집사람은 새벽 기도를 나갔는데 돌아올 때마다 눈이 퉁퉁 부어서 오곤 했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이 때 집사람은 "왜 하필 내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만 37밖에 안된 내가 왜 하필. 식습관/생활 습관도 나쁘지 않았던 내가 왜 하필. " 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암에 대한 이해는 많이 진전이 되었고 와이프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으로 "내가 왜 하필" 이라는 생각도 저도 있었습니다. "다른 집은 다 잘 지내는데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습니다. 그저 가슴이 답답하더군요.
수술 받기 전주 주말에 "내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마저 다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후반부로 가니 재발 얘기가 나오더군요. 수술과 항암치료가 문제가 아니라 재발과의 공포와 싸우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때서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포는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가 아니라 "어떤 끔찍한 일이 끊임없이 반복될 거야"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게 토요일이었는데 그 때부터 수술을 받는 화요일 오전까지 3일동안 평생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네요.이상하게 집사람 얼굴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더군요.
아마도 그건 평생 재발의 고통에서 싸워야 하는 와이프의 슬픈 운명, 그리고 내가 왜 이런 무거운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가 하는 내 자신에 대한 한탄이 뒤섞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도 참 감사하고 놀라웠던 것은 집사람이 절 위로하더라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 집사람이 펑펑 울고 있는 저를 위로했습니다." 같이 울지도 않고 저를 위로해 주고 안아 주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이제 마음이 평안하다는 겁니다. 말이 됩니까. 수술을 며칠 앞두고 평안하다니. 그런데 눈을 들여다 보니 정말로 평안해 보이더군요. "정말로 평안해 보였고 이미 위로 받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코메디 아닌가요? 위로해 주어야 할 남편은 펑펑 울고 있고 위로받아야 할 아내가 남편을 쓰다듬고 있으니. 아내의 말로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도의 힘이 느껴져서 마음이 한량없이 평안하다" 였습니다. 신앙심의 깊이의 차이였겠죠.
5월 11일 아침 6시 30분 수술 들어가기 전에 정말 감사하게도 구역목사님과 전도사님, 순장님이 오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같이 기도드리면서 펑펑 운 건 저였고요. 그리고 그날 수술은 잘 되었고 집사람은 퇴원해서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열심히 체력 보강을 하고 있네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한달 동안 참 저 자신과 우리 부부, 아이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 때 한 "생각"은 지난 세월 제가 했던 생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야 말로 절박했으니까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제대로 깊게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저는 집안일을 house keeping과 child care 2가지로 구분합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2가지 일은 당연히 집사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저는 보조자로 생각해 왔습니다. 집사람도 회사(초등학교)에 다닙니다. 퇴근만 빠를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요리/청소와 아이 교육을 다 합니다.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이죠. 이것의 유일한 근거는 "원래 한국사회란 그런 거야" 일 겁니다.
저는 원래 선천적으로 술을 못 마십니다. 집안 내력이죠. 그래서 한국의 술 권하는 문화가 참 싫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동성애자나 장애인들과 같이 우리 사회 소수자들의 인권같은 것을 더 옹호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저 스스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와이프에게 집안일을 강요해 왔었고 그걸 묵인해 왔다는 것입니다. "다 그러니까"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아이 교육 대단히 힘듭니다. 아이들 끼니 마련하는 것 굉장히 힘듭니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힘듭니다. 힘드니까 같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반성이 많이 들었습니다. 집안일은 아내의 일이 아니라 부부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바뀌면 사회도 바뀔 겁니다.
잠시나마 죽음의 그림자를 깊게 느껴 보면서 인생을 좀 더 갚어치 있게 살아가야 된다라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오늘을 갚어치 있게 살아가야 될 거 같아요. 내일은 너무나 불확실합니다. 내가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계속 해야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적어 보고 싶네요.
"여보~ 수술 받느라 힘들었을텐데 못난 남편도 위로해 주느라 고생 많았다. 남은 치료도 잘 받자. 10년동안 수고한 거 곱배기로 보답할께. 사랑한다.~"